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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소개 ARI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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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민담, 민요

시대와 지역과 사상을 초월한 민족의 노래
정선 아리랑

지정번호 :강원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호
지정일 :1971년 11월 16일
소재지 :정선군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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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유래, 기록

우리나라 영서·영동지방에 분포되어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 고장 민요 정선아리랑은 일명 아라리라 부르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 널리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인 조선 초기라 전한다. 당시 고려 왕조를 섬기던 선비들 가운데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에서 은신 하던 72현 가운데 7현은 정선 (지금의 남면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 동안 산 나물을 뜯어 먹고 생활하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세하였다. 그들이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을 한시로 읊은 것 중 정선 아리랑 가사로 인용된 것이 많다.7현들이 이러한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알려 주면서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며. 그 후 사화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전란과 폭정시에 고달픈 민성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 『아리랑. 아리랑』하는 음율(후렴구)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 (또는 경복궁 중수시)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나라없는 민족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 스스로를 달래 왔었다. 일제를 거치는 동안 사상이 담긴 노래는 탄압됨에 따라 애정과 남·여 관계의 정한을 소재로 한 새로운 노래가 많이 불리어 졌으며. 예로부터 전하여 지는 노래와 함께 오늘날 우리 나라의 독특한 가락을 지닌 민요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양가 원본

한양가 원본

1844 한양가

조선 왕도인 한양성의 연혁, 풍속, 문물, 제도, 도국 및 왕실의 능행경 등 한양을 중심으로 조선의 역사를 노래한 가사집이다. 1844년 헌종 10 한산 거사가 한글로 쓴'한양가'를 정본으로 쓰고 있으며, 이 밖에 1913년 사공 수의 '한양이 백 년 가', 안동인 김호직의 이조오백년사화 등 이본이 있으나 내용은 비슷비슷하다. 이 책에는 고종 때 사당패가 대궐까지 들어와아리랑 타령을 불렀다는 가사가 있다

옛 경복궁 사진

옛 경복궁 사진

1865 아리랑의 시작

아리랑이 어느 시대에 생겨났는지는 정확지 않으나,경복궁 중수 기간인 1865년부터 7년간이 소위 아리랑 발생(發生), 전이, 또는 확산 된 시기로 보고 있다.경복궁 중수 기간 동안 장정들이 공사장에서 힘을 썼으니 고됨을 덜기 위해, 고향에 두고 온가족을 달래기 위해서 노래는 필연적 조건에서 창출되었을 것이다. 타 지역 부역인 이 부르는노래를 모두가 함께 부르고 향유하는 과정에서 지역적 변이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이 노래는 귀향 부역인들에 의해 다시 전 지역으로 전파 및 확산되었을 것이다

최초로 기록된 아리랑 악보

최초로 기록된 아리랑 악보

1896 최초의 아리랑 악보

경복궁 중수 이후 서울에서 불린 아리랑을 처음으로 서양식 기보법으로 기록한 사람은 대한제국 왕립 영어학교 교사로 고종의 외교 자문이자 저술가로 활동한 호머 헐버트 (Homer B. Hulbert ·1863~1949)였다. 그는 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해 발행한『 The Korean Repository 』에 1896년‘Korean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아리랑 악보와 가사를 해설과 함께 실었다.

복원된 아리랑 원통형 음반

복원된 아리랑 원통형 음반

1896 최초의 아리랑 음원

1896년 7월 24일 미국의 인류학자 엘리스 플레처(Alice Cunningham Fletcher, 1838~1923)가 미국 워싱턴 하워드 대학에 유학 온 안정식(당시 27세), 이희철(당시 26세), 양손(Son.Rong –신원미상)이 부른 한국 노래를 에디슨 원통형 음반에 채록했다.이 음원은 1998년 한국국악 학회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로버트 프로바인 교수가 카세트테이프 음원을 소개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정선
민속 설화

정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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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와 화주일춘

옛날 관음사(정선읍 봉양 6리)에 일춘대사라는 승려가 있었다. 이 승려는 불도에 정통하여 세인의 존경을 받아 왔는데 한때 일춘대사는 관음벼루 절벽 아래다 인마가 통행할 수 있는 교량을 가설하겠다고 민가의 재물과 고철을 수집하였으나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약속을 어기고 이를 팔아 착복하였으니 일춘대사는 금시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문에 죄를 얻은 대사는 얼마후 부처님의 죄를 받아 큰 먹구렁이로 변해 통로를 가로막아 관음사를 찾아드는 행객은 끊어지고 절은 얼마 안가서 쑥대밭에 묻히게 됐다.
그로부터 십여년 세월이 흘러간 후 어느해 봄의 일이다. 때마침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 4사람이 정선을 지나가게 되어 주막에서 유숙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의 꿈에 백살노인이 머리에 송낙을 쓰고 목에는 백팔 염주를 걸고 점란가사에 구절죽장을 짚고 와서 합장하고 허리를 구부려 정중히 절을 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곳 관음사에 있는 승려로 불문에 득죄하여 뱀으로 변신된지 오래였는데 지금 다행히 귀인을 만났으니 바라건데 공은 노고를 아끼지 말고 화주일춘 네 자만 관음벼루 석벽에 새겨 왕래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 주면 공은 이번 과거에 급제할 것이며 소승도 불문의 죄를 면하게 될 것이니 내 말을 잊지 말고 꼭 새겨달라고 당부했다.
선비가 잠을 깨니 꿈이라 이상히 여겨 일행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주막주인에게 사실을 물어보니 그런 일이 있다하여 승려의 말대로 글씨를 새길 것을 결심하니 같은 일행 중 자기 혼자 과거에 급제하기 보다는 다같이 급제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며 네 사람이 뜻을 모아 한 자씩 화주일춘 넉자를 새겨놓고 한양길을 떠났다. 그후 신기하게도 모두 급제하여 금의귀향 했으며 관음벼루 절벽에 가로누워 행인의 발길을 막던 구렁이는 자취를 감추고 행인은 마음놓고 이곳을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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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로 옮긴 용탄 벽사

오래전 옛날 정선읍 용탄리에 벽절이라 불리우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지에 사탑만이 있어 그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재미있는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옛날 이 벽절에는 2~3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하루는 달빛이 교교한 밤중 조용한 사찰주변에 멀지않은 강변에서 웬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여오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노승은 마음이 섬뜩함을 느끼면서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황급히 달려가 보니 나이가 20세 가량 되었을까 말까하는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맨버선발을 치맛자락으로 머리를 덮어쓰며 강물에 뛰어들려고 하였다. 노승은 급히 가서 물에 빠지려는 여인을 만류하며 「어인 일이신지 몰라도 젊은 나이에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한즉 여인은「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니 차라리 먼저 가신 남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려고 합니다」하고 몸부림을 치니 노승이 위로하기를「부인께서는 마음을 고쳐먹고 부처님께 자신의 부덕함을 사죄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줌이 옳지 않느냐?」고 타일러서 그날부터 여인은 절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후부터 그녀는 벽절에서 수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며 나날을 보내게 되었는데 시일이 경과할수록 이 노승의 마음은 여인으로 하여 흔들리게 되고 여인 또한 고적한 산중에서 외로움을 견딜수가 없이 노승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고 의지하게끔 되었다. 이에 마침내 두 사람의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앞 뒤 분별도 할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 두 사람만의 은밀한 관계는 마침내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의분의 분에 넘친 젊은이들이 작당하여 두 사람을 징벌키로 정하고 벽절로 몰려가 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벽절은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노승과 여인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이는 분명히 부처님의 노함을 받아 추방되었을 것이라 전하며 뒷날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절이 자리를 옮겨 지금의 경기도 여주읍 앞산에 위치하고 있는 같은 이름의 벽절이 되었다고 하며 한때는 이곳 사람들이 여주에 가서 절세를 받아 왔다는 말도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이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이 절터에는 이름없는 석탑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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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바우 서리

옛날 정선읍에 황씨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사람됨이 인색하고 성질이 거칠어 이웃간에 돈만 아는 먹통이라고 별명이 붙어 미움을 받아 왔는데 하루는 홀연히 노승이 나타나 황부자에게 시주를 청하니 괴벽스런 황부자는 시주할 쌀이 어디 있느냐 하고 소리를 벌컥 지르며 마구간에 들어가 쇠똥을 한 삽 떠주니 늙은 승려는 바랑을 벌려 받아 넣고 합장 배례하고 돌아서면서 이 집의 가운이 이제 다 됐으니 곧 망하리라 한마디 남기고 죽장망해를 끌며 떠났다.이 말을 들은 황부자는 화가 치밀어 참지를 못하고 펄쩍 뛰며 자기 집에 있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쌘 왕바우란 하인을 시켜 그 승려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왕바우가 부랴부랴 짚신 끈을 매고 노승을 뒤쫓아 힘껏 달려갔으나 이상하게도 노승은 잡힐 듯 하면서도 따를 수가 없었다. 애가 타서 숨을 헐떡거리는 왕바우는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하는데도 노승은 여전히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노승이 돌아서더니 너는 악한 주인의 죄를 대신 받아야 하느니라 하고 말하며 지팡이로 땅을 세 번 울리니 이게 웬일인가, 왕바우는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하고 발이 붙어 떨어지질 않고 차차 혈맥이 굳어져 장승처럼 선 채로 죽고 말았다. 그 뒤로부터 이곳은 비명에 간 왕바우 서리라고 불리워졌으며 그후 얼마 안가 노승의 말대로 황부자도 벼락을 맞아 집과 가솔이 몰살을 당해 이름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이 같은 전설을 지니고 있는 이 왕바우 서리에는 조양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